이론, 게임, 이야기
게임을 하던 이야기를 하던 이론은 우리 생각을 명료하게 하고 플레이를 도와주기도 합니다. 물론 편견에 끼워 맞추며 오도하기도 하고요.
이론은 플레이를 다채롭고 풍요롭게 해줘야 합니다
이론만을 위한 이론이나, 승패를 위한 토론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론이나 개념을 좋아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룰 북을 여럿 사면 룰 북에 나오는 마스터링 팁을 꼼꼼히 읽어보고, 플레이의 예시나 규칙을 읽으면서 의도를 파악하곤 합니다. TRPG가 아니라도 삶에 많은 것들을 이렇게 접근합니다.
살면서 “책을 들여다본다고 거기 답이 있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복잡한 TRPG 이론은 모르고 룰 북을 달달 외우지 않더라도, 그 룰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재미있게 플레이하는 마스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반면에 복잡한 이론을 내세우고 게시판에서 토론을 하더라도, 새로운 사고 방식이나 룰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 역시 실제로 플레이를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
결국 TRPG를 하는 이유는 “하나의 올바른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우리가 TRPG를 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재미를 위해서라곤 하지만 각자 생각하는 재미도 다릅니다. 누군가는 미니어쳐를 올려놓고 미터 단위로 계산하기를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영화 같은 액션 장면 만들기를 좋아할 수도 있고요. 둘 다 하는 사람도 있고, 둘 다 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 가족 유사성, 분류에서도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구분짓고 단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이해하고 플레이를 다채롭고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어야겠죠.
플레이하며 겪는 일을 이론으로 설명하기
우리는 플레이하면서 많은 일을 겪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재미있었다면 왜 재미있었는지, 별로였다면 왜 별로였는지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플레이가 끝나고 피드백을 하면서 “와 재미있었어요.”, “이번은 좀 몰입이 안 됐어요.” 같은 말이 나오고. 다들 고민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고민을 해왔습니다. 다들 나름대로 설명을 시도해서 만드는 것들이 개념이고 이론입니다. 한 가지 개념을 배우고, 해석을 해보면서 비로소 막연하게 보였던 것들이 이해가 됩니다. (혹은 이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할지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920년대가 배경인 크툴루의 부름을 하는데, 계속 답답한 기분이 듭니다. 입문 시나리오인 유령의 집같은 느낌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플레이를 하면서 뭔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플레이어들은 신문사로 가서 정보를 찾으려 합니다. 시나리오에는 사건을 담당한 기자가 펠튼 씨라고 나와있는데. 플레이어들은 아직 펠튼 씨를 모릅니다.
마스터: “다들 분주하고 바빠보입니다. 수 많은 기자들이며, 직원들, 편집자 분들이 테이블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뭔가 타이핑도 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요?”
플레이어1: “음… 설득을 쓸 수 있나요?”
마스터: “누구에게요?”
플레이어1: “기자에게요.”
마스터: “굴려보시죠.”
플레이어1: (실패한다)
마스터: “바쁜데 왜 붙잡냐고 꺼지라 합니다. 다른 분들도 설득 있으신 분 있나요?”
플레이어2: 저도 있어요. (실패한다)
플레이어3: 저도 굴릴게요… (성공한다)
마스터: “기자는 그제서야 마지못해 여러분을 펠튼 씨에게 안내해줍니다.”
여러분도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셨나요? 만약 다들 이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문제는 마스터나 플레이어가 부담을 느끼거나,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시작합니다. 아마 여러분의 머리 속에도 이런저런 설명이나 이론이 떠오를지 모르겠습니다.
선택지 vs 행동
한 가지 설명은 TRPG에서는 행동을 묘사하고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이는 컴퓨터 게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TRPG를 전에 해보지 않았거나, 선택지를 고르는데 익숙한 분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TRPG를 컴퓨터로 옮겨놨다는 게임조차 그렇습니다. 보통은 대화를 대충 눈으로 훑으면서 선택지를 고르는 게 전부입니다. 보통 수 많은 작가들과 개발자들이 풍부하고 복잡한 선택지, 분기 등을 미리 준비해둡니다.
이런 플레이에 익숙한 분들은 TRPG를 하면서도 비슷하게 하려 합니다. 마스터는 상황과 선택지를 다양하게 만들어서 주고 묘사를 하려하고. 플레이어는 거의 묘사를 하지 않는 것이죠.
잘 해낸다면 역시 즐거운 플레이입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습니다.
먼저 마스터의 부담이 커집니다. 캐릭터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위와 같은 상황에서는 기자에게 무엇을 설득한 건지, 어떻게 말을 걸었는지 상상해야겠죠.
더 나아가 이야기의 중심이 판정의 결과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상황을 보여줘야 하고. 플레이가 재미 없었다면 마스터에게 책임이 돌아옵니다.
플레이어들도 주사위를 굴리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면서 지루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에는 재미있지만, 계속 실패하면 재미가 없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이런 때 책이 도움이 됩니다. [크툴루의 부름 수호자 룰북]의 13페이지에 나오는 플레이의 예시를 보시거나, 193페이지의 플레이의 진행에 대한 조언을 보세요.
플레이어에게 물어보세요. 플레이어가 룰 용어보다는 탐사자의 행동을 중심으로 말하도록 유도하세요. 플레이어가 판정을 하고 싶다며 행동을 제안하면 탐사자가 실제로 무슨 행동을 하는지 물어보세요. 플레이어에게 판정을 요구하는 것은 수호자의 몫입니다. 그리고 판정요구만으로는 상황의 극적인 분위기를 전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TRPG와 컴퓨터 게임을 비교하는 관점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컴퓨터 게임과 TRPG들이 비슷한 것도 많고 빌려오는 점도 많습니다. 하지만 둘이 다르다면, TRPG에서만 가능한 것들도 많고요. TRPG의 장점을 더 잘 살리면 더 좋은 플레이가 될 때가 많을 겁니다. 아마 다른 글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여러 번 보시게 될 겁니다.
이론으로 플레이를 풍부하게 하기
규칙이 기반하는 개념이나 이론을 이해하면, 플레이를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가 플레이하는 RPG 규칙들은 각자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에 맞지 않게 플레이하면 재미가 없거나,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랑 안 맞는다”고 하면 보통은 바로 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거꾸로 한 번 이 의도를 이해하고 나면. 그 규칙의 여러 장치들을 잘 활용하면서, 풍성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알 수록 더 많이 보인다고 하죠? 이것도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숫자만큼이나 이야기 속 현실을 활용하기
던전월드나 누메네라(사이퍼), 페이트코어 같은 규칙에서는 숫자만큼이나 묘사를 사실로 여기고 활용합니다. 그래서 “이야기 속 현실”, 이나 “논리”를 중시하고 “면모는 사실”이기 때문에, 숫자로 적힌 것 이상의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메네라에는 몸을 불로 뒤덮는 능력을 가진 캐릭터들이 있습니다. 그 말은 나무나 불이 붙는 물질이 있으면 이 캐릭터는 불을 피울 수 있다는 뜻일 겁니다. 전투 중에 갑자기 건물에 불을 지를 수도 있고요.
겁스 같은 알피지에서는 이렇게 불을 붙이는데 피로점(마나 같은)이 얼마나 필요한지 규칙이 있습니다.
한편 어떤 알피지나 테이블에서는 전투 중에 저런 플레이를 허용하지 않기도 합니다. 규칙으로 만들어 놓은 밸런스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임들에서는 밀밭에서 파이어볼을 날려도 효과일 뿐이기 때문에 산불이 나지 않기도 합니다. 마스터가 산불이 나게 하고 싶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요.
반면에 던전월드나 누메네라, 페이트코어 같은 규칙에서는, 오히려 이런 이야기 속 현실이 플레이의 핵심입니다. 룰 북에는 신기한 효과를 가진 마법 아이템이나 능력들이 있고요. 이야기 속 묘사는 ‘장식’이 아니라, 극적이고 전략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다른 알피지에서도 활용할 법합니다. 저는 13시대를 할 때 마을회관에 튼튼한 기둥이 있다고 했는데요. 거대한 트롤과 싸울 때 플레이어들이 기둥에 쇠사슬을 꽁꽁 묶고는, 그대로 트롤의 주위를 빙빙 돌며 묶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한편으로는 이런 이론이나 사람들의 설명이 우리를 오도하거나, 헷갈리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서로 맞지 않는 개념을 섞어서 아쉬움만 남기도 하고요. 정의, 가족 유사성, 분류말하겠지만, 어떤 개념들은 가능성을 죽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한데, 이론은 보통 상황을 단순화시키기도 합니다. 개념이 말하지 않는 것까지 오해하기도 하고요. 또 아무리 좋은 것도 우리 테이블에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잘 다루지 못하는 개념들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줄거리를 미리 정하지 마라?
예를 들어 누메네라나 던전월드 같은 알피지에서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플레이어들의 행동은 예측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스터가 생각한 길로 가지 않습니다) 이 두 알피지는 플레이어의 행동을 더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스전을 공들여 준비하면, 플레이어는 공중 부양 사이퍼를 써서 보스가 있는 곳을 넘어가버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해는 여기서 여러가지로 뻗어갑니다. 예를 들어 마스터가 준비를 하거나, 시나리오를 만들면 안 되고 모든 걸 즉흥으로 해야 한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룰 북에도 나와있지만 이야기에 나올만한 요소들과, 묘사나 아이디어, 캐릭터 이름 등을 준비하면 됩니다. 시나리오가 있는 알피지조차 컴퓨터 게임처럼 어떤 상황이 나오는지 하나하나 묘사까지 적혀 있진 않습니다. 명확한 아이디어와 디테일에 풍부한 살을 붙여가는 것은 플레이하면서 하게 될 일입니다.
또 다른 오해는 진상을 미리 정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상은 줄거리와는 다릅니다. 줄거리는 플레이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고, 진상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던전월드나 누메네라에서는 모든 정보를 플레이어에게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모르는 진상이 있어도 상관 없습니다. 물론 아직 나오지 않았을 때에는 진상이 안 정해져 있거나, 정합성을 위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는 특히 미스터리 알피지에서 중요합니다. 미스터리 장르에서는 단서 간에 정합성과 논리가 특히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시나리오를 만들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테스트도 하지 않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되고, 플레이어들이 흥미를 잃게 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줄거리가 정해지는 건 아닙니다. 캐릭터들이 진실을 밝혀낼지, 밝혀내지 못할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저지하는지? 캐릭터가 어디로 갈 수도 있고, 플레이가 끝날 때까지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건 질문으로 남기고 플레이하면서 알게 됩니다. 이는 크툴루의 부름의 비선형 시나리오나 크툴루 컨피덴셜 같은 알피지에서도 그렇습니다.
물론 마스터가 이런 논리에 익숙하다면, 순전히 즉흥으로 플레이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플레이어들과 같이 추리해서 진상을 정한 적도 있습니다. 특히 플레이어와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페이트 코어 같은 알피지에서는 이런 기법이 유용합니다. 추리소설 작가 중에도 중간까지 이야기를 쓴 다음, 직접 추리를 해서 결말을 정한다는 사람도 있으니. 이 역시 한 가지 방법입니다.
목적을 생각하면서 배우고 나아갑시다
제가 여기서 든 예시와 개념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의 룰 북에서, 포럼에서, 각종 조언들에서 더 많은 이론을 발견하고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여러 개념을 소개하고 플레이에 적용하고 고민하는 이야기들을 풀어보려 합니다.
그런 이론들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늘 그렇지만 세상에 절대적인 정답은 없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를 뿐입니다. 던전월드를 줄거리를 정해놓고 플레이할 수도 있으며, 선택지를 고르듯이 티알피지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테이블에서 재미있고 가치 있다면 좋습니다. 이론은 우리를 평가하고 점수 매기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다양한 입장을 이해할 수록, 우리 플레이는 더 재미있어질 겁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기도 하고요. 내가 싫어한다고 오해했던 걸 좋아하게도 됩니다.
다음은 몇 가지 제안입니다.
- 내가 플레이하는 룰 북을 읽고, 플레이의 예시도 살펴보세요. 내가 했던 플레이와 비교해보세요.
- 플레이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생각해보고, 그걸 설명하고 개선하게 도와주는 이론을 찾아보세요.
- 다른 알피지를 플레이해보고, 좋았던 부분이 우리 알피지에도 비슷한 게 있는지 찾아보세요. 알피지들은 서로 배우기 때문에, 좋은 방법들은 비슷하게 퍼집니다.
- 차이점에도 주목해보세요. 예를 들어 누메네라의 분발과 크툴루의 강행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 나 혹은 우리 테이블에서 어려워하는 부분은 뭔가요? 어떻게 하면 그걸 더 잘 할 수 있을까요? 룰 북에서 이를 도와주는 장치는 어떤 게 있나요?
- 룰 북을 읽으면서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을 짚어주는 설명을 찾아보세요. 보통 “앗 이런 거였어?”하고 놀라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 룰에는 있지만 플레이에 활용하지 않았던 부분을 찾아보세요. 예를 들어 던전월드나 누메네라를 하면서 ‘인연’을 정하고 플레이에 사용해본 적이 있나요? 인연에서 시나리오 하나가 통째로 나오기도 합니다. 구경 책임제도 읽어보세요.
- 사람들이 해주는 조언과 룰 북의 말을 비교해보세요. 모순되는 부분이 있나요? 사람들은 왜 그런 조언을 했을까요? 룰 북의 의도를 지키면서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